[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국보>를 봤다. 일본에선 문화현상이 될 정도로 공전의 성공을 기록했지만, 국내 개봉은 조용하게 진행 중이다. 옆 나라 열풍과 달리 국내 관심이 시큰둥한 데엔 이유가 있다. '왜색' 끝판왕 '가부키'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3시간 육박하는 대작이다. 1차 관문 용케 넘어도 2차 장벽에 가로막히기 딱 좋다. 그런 좁은 문을 통과해 도착한 실물은 어땠을까?
반세기 동안 펼쳐지는 대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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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스틸
ⓒ 미디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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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2차 대전 패망 이후 부흥한 일본에선 문화예술 붐이 한창이고 덩달아 야쿠자도 활황이다. 지역의 유력한 조직 타치바나구미 신년회가 고급 요정에서 성대하게 열리던 참, 공연차 방문한 오사카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는 그곳을 방문해 환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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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을 위한 약식 가부키 공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의 소년 배우를 발견하고 누군지 묻자 뜻밖의 답을 얻는다. 보스의 아들 '키쿠오'란 것. 흥미가 생긴 한지로는 소년과 만나길 청하고, 키쿠오는 유명 배우와 대화할 행운에 부푼다. 하지만 경쟁 조직의 습격이 벌어지고, 키쿠오의 부친은 체면이 손상되는 탈출을 포기하고 장렬히 맞서다 아들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앞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 순간 키쿠온의 눈앞에 어떤 '풍경'이 잡힌다.
1년 후, 키쿠오는 오사카의 한지로를 찾는다. 그때의 인연으로 한지로가 그를 돌보기로 한 것.후견인이 된 한지로는 부친의 복수는 그만두고, 소질이 있던 가부키 배우로 입문을 권한다. 의지할 곳 없던 키쿠오는 이를 수락하고, 동갑인 한지로의 아들이자 가부키 명문의 후계
릴게임한국 자 '슌스케'와 혹독한 훈련에 돌입한다. 고단한 시간이지만 동경하던 가부키의 길에 매진하며 인정받기 시작한 키쿠오는 슌스케와 선의의 경쟁자이자, 둘도 없는 동료가 된다.
피비린내 나는 야쿠자 혈연과 단절하고 새 출발 겸, 그토록 원했던 예술인의 길에 매진하던 키쿠오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가부키 가문의 계승자는 실력순이 아니라 철저히 혈연에 따른다. 최고가 된다는 건 태어날 때 결정된다. 하지만 실력을 감출 수도 없는 노릇. 자연스레 둘은 저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제 그들은 수십 년 동안 개인의 성취와 주변의 응원 속에 기구하고 처절한 승부를 펼쳐야 한다.
가장 '일본적인' 예술의 숨 막히는 우주
▲ <국보> 스틸
ⓒ 미디어캐슬
영화가 끝났다. 3시간 꼬박 걸렸다. 하지만 이제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 대신에 아쉬움과 아련함이 뒤범벅된 기분이 엄습한다. 벌써 끝나버렸다는 안타까움, 이 찰나가 좀 더 이어지길 바라는 미련, 눈부신 매혹을 체험한 감흥이 엉켰다. 그야말로 '대작'의 향취가 가득했다. 고전 명작에서 느낄 수 있는 바로 그런 기운이다.
<국보>는 전술한 대로 가부키를 통해 주인공의 인생을 펼치는 작업이다. 가부키를 모르고 봐도 장렬하지만, 깨알 같은 장치들이 가득하기에 해당 예술 장르를 알고 보면 두세 배는 다른 체험이 되는 식이다. 진입 턱이 높지만, 그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으면 짜릿함이 온몸을 지배한다. 마치 영화 속 가부키 배우들이 고난의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부키는 우리에겐 낯선 장르이지만, 일본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필수 경로다. 예시를 들어보자. 아무리 왜색 용어를 근절하고 순수 우리말을 쓰자고 해도 대체하기 힘든 게 여럿 있지만, '쌈마이(3류)'나 '18번' 같은 표현은 이제 한국어에 녹아든 지 오래다. 이게 다 가부키에서 유래한 표현이라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다. 현대 일본 아이돌 문화에서 널리 통용되는 '쇼니치(첫 공연)', '센슈락(마지막 공연)' 용어 역시 원래 가부키 공연의 첫공/막공을 뜻하던 말이다.
영화는 그렇게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가부키의 세계로 깊숙하게 들어간다. 키쿠오와 슌스케, 두 친구를 중심축으로 벌어지는 반세기의 대결 구도를 이해하려면 가부키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에겐 고작해야 특정 문화 계승자에 불과하지만, 가부키 전통을 숙지하지 않으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왜 저렇게 물고 뜯고 난리가 나는지 소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에 뿌리 깊은 반일주의가 첨가되면, 고상한 척 포장해도 17세기에 출발한 저잣거리 공연에 불과하던 걸 상술로 포장해서 과장되게 고급화한데 불과하다거나, 비하하기 시작하면 유흥가 홍보용 춤이 기원이라는 '극딜'까지 나올 테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만화 <효게모노>에 가부키의 어원이 나온다. '색다르고 첨단적인 모양을 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유행의 첨단이라며 기괴하고 튀는 행동을 일삼던 풍조를 지칭한다. 마치 영화 <대부>가 길거리 조직폭력배를 그리스 비극 주인공처럼 형상화하는 바람에 실제 마피아들이 엄격한 입단절차와 고급 사교 문화를 따르게 되듯, 가부키 역시 생존을 위한 진화과정에서 전통예술과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종합연극 요소를 흡수한 셈이디.
기구한 인생을 담아내다
▲ <국보> 스틸
ⓒ 미디어캐슬
해당 만화엔 가부키의 출발점도 묘사되는데, 시조라 할 배우 이즈모도 오쿠니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이었지만, 이후로 여성 배우의 계보는 끊긴다. 유곽과 연결된 이미지 탓에 당시 막부가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가부키는 모든 배역을 남자 성인이 연기하는 게 전통이 된다. 영화 속 키쿠오와 슌스케가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담당한 역할인 '온나카쿠'가 바로 여성을 연기하는 남자배우 역할을 칭한다. (이 지점에서 <패왕별희>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습명(襲名)'은 단순히 수제자를 넘어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경합이다. 한지로 가문의 이름을 얻는 건 가부키 명가의 후계 자리를 독식하는 위치다. 일본에서 가부키 명가는 귀족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건 물론, 최상류층으로 인정된다. 젊은 여성 연기자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게 당연시되는 일본 방송가에서 가부키 명문 출신 여배우는 예외란 점만 봐도 그들이 가진 특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강력한 권위를 가진 존재다.
슌스케에게 보장된 한지로 가문 세습에 '굴러온 돌' 키쿠오가 언급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다. 가족 내부의 분쟁을 넘어 논란은 커진다. 일본 서부를 대표하는 명가의 계승권 다툼에 극장과 극단 전체는 물론, 거대 기업과 미디어도 가세한다. 유력한 가부키 배우는 모두 대기업 '쇼치쿠' 소속이다. 배우의 결혼까지 참견하는 회사가 유력 명문 계승에 개입하지 않을 리 없다. 이권과 자존심이 걸린 습명 문제에 수백 수천 명의 운명이 달렸다. 엄청난 중압에 키쿠오도 슌스케도 흔들린다. 숙명에서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게 된다.
슌스케의 모친 '사치코'와 키쿠오의 딸을 낳은 '후지코마' 같은 여성 캐릭터의 역할도 눈여겨봐야 한다. 실제로 엄청난 가부키 명문의 장녀인 배우 테라지마 시노부가 맡은 사치코는 남편의 극단, 웬만한 회사 뺨치는 규모의 조직을 진두지휘하며 자식 교육까지 책임진다. 가부키 명가들이 단체 관람하며 그 고증에 찬사를 보낼 만큼 가문의 여성들이 짊어진 고충을 제대로 표현한다. 귀족 대접을 받는 명가는 며느리 맞이도 엄격하다. 후지코마는 키쿠오의 아이를 낳지만, 정처로 인정받지 못한다. 게이샤 출신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그늘에 가려져야 한다. 반대로 명문의 딸과 사귀는 건 배역을 따내는 데에도 유리하다. 개인은 개인이 아니다.
<국보>를 제대로 즐기려면, 가부키로 상징되는 일본 문화 자체를 소화해야 한다. 영화 한 편 똑바로 보기 위해 뭐 그렇게 까다롭냐고 불평할 수 있지만, 정말로 제대로 알고 보는 것과 아닌 건 차원이 다른 체험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영화라는 대중예술이 총체성을 띠는 장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아마 이 영화 세부 고증만으로도 설정집 책 한 권 너끈히 나오지 않을까?
감독 이상일이 일본에서 도달한 어떤 극점
▲ <국보> 스틸
ⓒ 미디어캐슬
이 영화는 무시무시하다. 감독 이름은 '이상일', 일본영화인데 왜 이런 이름일까? 감독은 재일교포 3세다. 대개 집안에선 한국 이름을 불러도 활동명은 일본식으로 짓게 마련인데, 일본감독협회장을 오랜 기간 역임한 고 최양일 감독과 함께 정말 드문 경우다. 혐한이 난무하고 재일조선인 차별이 여전한 일본에선 쉽지 않은 선택이란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일은 영화 외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작품에서도 굳이 재일조선인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진 않는다. 그저 슬쩍 소수자에 관한 관심으로 아이누나 혼혈 문제와 동일한 선상으로 취급해 왔다. 오직 영화 자체로만 승부를 건 셈이다. 성공을 위해 작중 키쿠오처럼 편견과 무시를 겪으면서도 정공법으로 영화를 잘 만들어 인정받겠다는 뚝심 하나로 버텨온 격이다. 여러 편의 성공적인 작품을 내놓았지만, '거장' 표현엔 아주 조금 애매한 위상에 머물다가 마침내 일본을 대표하는 위치에 올랐다. 여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그것도 일본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것이라 자부하는 예술 장르, 가부키로 이룩한 성과다. 감독은 <국보>를 처음 구상한 것부터 15년 걸렸다고 한다. 가장 일본적인 것에 깊숙이 파고들어 어떤 일본인 감독보다 더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말았다. 이 영화가 탄생하는 전 과정이 고스란히 키쿠오가 평생을 바쳐 모든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며 이룩한 '국보'의 위업과 닮은꼴이다. 그래서 보고 나면 작품의 안과 밖이 무서울 정도로 동일하게 다가온다.
일본의 많은 감독이 그렇지만, 이상일 감독의 현장은 무척이나 혹독하고 엄격한 걸로 소문이 자자하다. 모 유명 여배우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분위기의 현장으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이상일의 작품을 연달아 작업한 후 자신의 연기 인생에 큰 영향을 줬지만, 무척 상반된 현장이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런 깨알 같은 '디테일'을 흡수하며 <국보>를 본다면, 예술과 인생의 상관성, 끔찍할 정도의 마성이 우리들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 주인공이 평생 쫓던 '풍경'처럼 어느 틈에 빨려들고 말 테다. <국보>는 그 모든 걸 잔혹한 매혹으로 구현한 영화다.
<작품정보>
국보
国宝
Kokuho
2025 일본 드라마, 역사
2025.11.19. 개봉 175분 15세 관람가
감독 이상일
출연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원작 요시다 슈이치, 소설 <국보>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 <국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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