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감지한 두 사람 - ‘서울 자가에…김 부장’ PD와 찰리 채플린
요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메인 프로듀서를 30여 년 전 대학 캠퍼스와 호프집에서 만났던 터라 더 반갑습니다.
아직 IMF는 오지 않았고 학생운동의 잔향이 남아 있던 캠퍼스에서 그는 가수 봄여름가을겨울의 ‘아웃사이더’를 부르며 세상을 다른 눈으로 해석하려 했던 청년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50대의 중년이 된 그는 지난 시대를 통과하며 몸으로 겪어낸 디테
신천지릴게임 일을 작품 속에 한 올 한 올 정확히 엮어 넣고 있습니다.
OTT의 대중화, K-스토리의 탄탄한 저변 —지금은 분명 그의 이야기가 가장 잘 피어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시대를 먼저 감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문을 연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변화는 시간이 지나 더 큰 의미로 되돌아옵니다.
바다이야기룰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100년 전, 시대의 문을 가장 먼저 열었던 한 인물을 다시 불러옵니다.
그의 이름은 찰리 채플린.
지금도 전 세계인이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훌륭한 배우나 감독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대중문화가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를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사이다쿨
● 100년 전 헐리우드를 번역하다
1925년 11월 마지막 주 신문 지면에서, 동아일보는 찰리 채플린의 생활과 창작 과정을 네 번의 연재로 다루었습니다. 직접 인터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어떤 자료를 번역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쿨사이다릴게임 조선 사회에 ‘활동사진’이 막 대중화되던 무렵이었습니다. 헐리우드는 먼 나라였고, 영화배우의 삶은 상상 속의 풍경이었지만, 이 연재는 단순한 연예 기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는 채플린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대중문화의 생산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처음으로 조선 독자들에게
릴게임무료 보여주려 했습니다.
아래는 그 네 편의 내용을 최대한 원문 분위기를 살려 재정리한 것입니다.
① 궁궐 같은 집, 사치와 창작의 시작 (11월 26일 보도)하리우드 중심에서 해안 쪽으로 약 오 마일 떨어진 ‘띄페리힐’. 채플린은 이곳의 작은 산을 통째로 사서 궁궐 같은 집을 지었다.부인 ‘포라’와 신혼을 준비하며 남녀 하인과 고용인을 합쳐 열 명 이상을 두었고, 일본인 하인을 특히 선호해 여섯 명쯤 두었다. 자동차도 아홉 대를 보유했다.아침 아홉 시에 일어나 빵과 차를 먹고 목욕한 뒤, 그날 마음이 가는 자동차를 직접 몰아 십여 분 달려 ‘스타듸오’로 향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사진은『촤푸린』애교자태. 1925년 11월 27일자 동아일보
② 조용하고 애상적인 성정, 철저한 창작자 (11월 27일 보도)
그가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늘 떠들썩하던 현장이 한순간에 고요해졌다고 한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풍금을 타는 일. 희극배우라는 이미지와 달리 그는 조용하고 애상적인 사람이었고, 정원에서 악기를 켜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며칠이고 촬영장을 찾지 않았지만, 한번 마음이 움직이면 밤을 새워 서른, 마흔 장면을 연달아 찍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은 서른 번, 쉰 번을 다시 찍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사진은 자긔 영화를 감독하는 촤푸린. 1925년 11월 28일자 동아일보
③ 웃음을 만드는 노동, 필름 50만 피트 (11월 28일 보도)
촬영 현장의 사람들은 그의 연기에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채플린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으면 모두 버려야 하는 ‘노동의 세계’가 있었다.눈 오는 장면을 위해 수십 석의 소금을 뿌리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통째로 폐기한 적도 있었다.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50만 피트 가까운 필름을 쓰기도 했고, 상영관에 몰래 들어가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의 작품을 더 치열하게 가다듬었다.
④ 열두 명의 지배인, 최고조의 인기, 그리고 메리 픽포드 (11월 29일 보도)
일 년 반 만에 영화를 완성해도 스스로 완전하다고 여기지 않을 만큼 엄격했다. 작품 하나만 완성돼도 사려는 이들이 몰려들어 채플린에게는 지배인이 무려 열두 명이나 있었다. 때로는 제작비 부담으로 몇백만 원의 빚을 지기도 했지만 헐리우드에서 그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최대의 경례를 했고, 무명배우에서 일류배우까지 모두 그에게 존경을 보냈다.
그가 가장 신뢰한 사람은 메리 픽포드였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그는 반드시 그녀의 의견을 먼저 물었고, 그녀가 “베리 굿”이라 말하면 그대로 실행했다고 한다.
● 시대를 먼저 읽은 사람들이 피운 꽃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찰리 채플린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자동차 아홉 대, 하인 열 명, 오십만 피트의 필름,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멈춰 세운 촬영. 이 과장된 일상 뒤에는 사실 새로운 시대를 가장 먼저 감지한 한 사람의 감각과 노동이 숨어 있었습니다. 1925년 신문이 기록한 채플린의 생활은 그저 사생활이 아니라, ‘대중문화’라는 낯선 세계가 막 태동하던 순간의 질감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김부장 PD’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대의 결을 읽고, 세월을 버티며 자기 감각을 지켜낸 한 사람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연속해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백 년 전 헐리우드도, 지금의 한국도 같은 원리로 움직입니다. 먼저 감지한 이들이 있고, 그들이 피운 꽃은 언젠가 더 많은 이들이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이 소개한 영화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의 사진과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눈에 들어오셨나요? 좋은 의견을 댓글로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