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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일부 확대), 1883, 캔버스에 유채, 75.5x99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공유는 콘텐츠 제작과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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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여인
이반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 1883, 캔버스에 유채, 75.5x99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누구도 그녀 이름을 알지 못한 카카오야마토 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으로도 꼽히는 그녀는, 그 명성과 맞물리지 않게 아직도 미스터리에 침잠(沈潛)해 있다. 여인은 여러 겹의 진한 쌍꺼풀을 달고 있다. 큰 눈과 높은 코, 갸름한 얼굴형도 갖추고 있다. 고전적인 미인상으로 둘 수 있을 것이다.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과 도도한 입매에선 굳센 성미를, 바다이야기디시 금장식 팔찌에선 당당함까지 엿볼 수 있다. 깃털 모자, 리본과 담비 털로 장식한 벨벳 코트, 북유럽식의 얇은 가죽 장갑…. 이처럼 화려한 복장은 당시 유행하는 차림새의 한 부류였다. 배경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근처로 추정된다.
그림이 세상 빛을 보고, 이러한 여러 ‘힌트’까지 자연스럽게 풀어진 그날.
화가 이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반 크람스코이는 그녀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름과 정체를 놓고 의문이 이어지는 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작품명을 따져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제목 또한 <미지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세계’
이반 크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람스코이, 미지의 여인을 위한 연구, 1883, 개인소장
그녀 안에는
한 시대가 통째로 서려 있다.
크람스코이가 마지못해 꺼낸 말 중 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신원을 확신하는 데는 크게 도움 되지 않을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녀를 두고 예술계에서는 어떤 추측이 나오는가. 이것은 그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고서, 큰 길을 넓게 돌아가보는 글이다.
추측① : 안나 카레니나
이반 크람스코이, 레프 톨스토이, 1873, 캔버스에 유채, 98x79.5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속 유명 문장을 언급하는 이유. <미지의 여인>이 실존 인물 아닌,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공인 ‘안나 카레니나’가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에 그렇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는데, 이는 마냥 넘겨짚기에는 꽤 그럴듯하다. 근거가 되는 사연은 이렇다. 1873년께. 마흔한 살의 사업가 겸 수집가인 파벨 트레티야코프는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미 《전쟁과 평화》 등으로 명성을 쌓아가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꼭 갖고 싶었는데, 이 기묘한 소설가가 작업 제의를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다. 온갖 연줄을 잡고 몇 년을 매달려봤지만 그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트레티야코프가 마지막 수로 택한 게 정공법이었다. 깐깐한 톨스토이조차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동시대 가장 출중한 화가를 보내 초상화 제의를 하는 게 그것이었다. 트레티야코프가 꼽은 실력있는 화가, 그가 크람스코이였다. 결과적으로 톨스토이는 크람스코이를 내쫓지 못했다.
살아 있을 때 초상화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누군가는 선생을 상상으로 그리겠지요.
크람스코이가 이런 말로 고집불통 인간을 설득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크람스코이는 서른여섯 살, 톨스토이는 마흔다섯 나이였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초판, 1878
크람스코이와 톨스토이는 그렇게 각자의 일상에 끼어든다.
초상화 그리기는 대체로 길고 지난한 일이다. 화가도 화가지만, 특히나 모델의 성향이 까다로울 때면 더욱 그렇다. 크람스코이는 아예 톨스토이의 집에 머물며 작업을 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때마침 당시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구상 중이었다. 크람스코이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뼈대를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많은 부분은 주인공 안나에 대한 내용이었을 터였다.
안나와 여인의 ‘닮은 점’
헨리히 마트베비치 마니저, 안나 카레니나, 19세기경
크람스코이는 그때부터 안나의 인상을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유명 인사로 등장하는 안나 또한 <미지의 여인> 속 그녀만큼 매력적 외모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어두운 머리칼에 ‘빨려 들어갈 듯’ 깊은 눈을 가진 안나. 그녀는 다만 극 중 보통의 상류층 여성과는 다른 면도 보인다. 사랑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정열적인, 결실을 위해선 절체절명 순간에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이다. <미지의 여인>의 여인 또한 그런 강단이 있어보인다. 안나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절한 비극으로 좁혀진다. 그러고 보면, 그림 속 여인 또한 그 물기어린 눈빛에서 슬픔이 읽히기도 한다. …그녀 안에는 한 시대가 통째로 서려 있다. 크람스코이의 말을 곱씹어보면, 이 또한 안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법하다. 실제로 《안나 카레니나》는 여인의 로맨스와 함께 철학, 종교, 역사 등을 1500쪽(한국어 번역 기준) 안팎의 긴 분량에 눌러담고 있으니. 그래서일까. 지금도 《안나 카레니나》를 다룬 여러 책과 자료에선 <미지의 여인>이 당당히 표지로 들어가곤 한다.
한편 톨스토이 또한 그 소설을 구상하던 중 크람스코이를 보고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크람스코이의 분신으로는 작중 조연급 등장인물인 미하일로프가 꼽힌다. 그는 지적인 예술가로 등장한다. 다만, 크람스코이와 미하일로프의 관련성을 믿기에 확실한 근거가 부족한 감은 있다.
추측② : 거리의 여인
이반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일부 확대), 1883, 캔버스에 유채, 75.5x99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사실, 안나가 <미지의 여인>의 정체로 떠오르기 전에는 전혀 다른 존재가 유력 후보군에 꼽혔었다.
그것은… 차려입은 매춘부였다. 여인이 쓰고 걸친 건 다 세련돼보이지 않은가. 따지자면 그녀에게서 진하게 느껴지는 건 찻잔의 달콤함이지, 술병의 쌉싸름함은 아니지 않은가. 이처럼 의아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이 그려진 19세기 말 당시 러시아 분위기를 비추면 생각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그 시절 러시아 상류층 여성의 상당수는 값비싼(과도한) 우아함에는 일부러 거리를 뒀다고 한다. 반짝 빛을 본 후 사그라들곤 하는 유행을 무턱대고 따르는 일에도 경계심이 있었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현상이 종종 감지되듯, 일종의 과유불급과 같은 태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즉, <미지의 여인> 속 차려입은 여인은 의외로 유력가 소속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그녀는 왜 굳이 화려한 복장을 했으며, 이를 위한 돈은 또 어디서 벌었는가. 이런 사고의 흐름 속 비평가들 사이 나온 답 중 하나가 매춘부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림을 본 동시대 한 비평가는 “마차에 탄 요부를 그렸다”는 식의 험악한 이야기도 했다.
그 연장선으로 냉랭한 눈빛, 눈에 띄는 복장을 한 채 ‘굳이’ 마차에 오른 모습을 지적하는 말도 있었다.
“벨벳과 모피로 치장한 (…) 여자가 호화 마차에서 당신을 향해 비웃듯 관능적인 시선을 준다. 이는 순결을 팔아 사들인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대도시의 타락한 여성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한다.” 또 다른 비평가는 이런 식의 감상평을 내놓을 정도였다.
추측은 이어진다
이반 크람스코이, 달밤, 1880
<미지의 여인>에 대해선 한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긴 하다.
크람스코이가 한때 사랑한 여인을 그렸다는 주장이다. 운명의 상대같던 그녀. 크람스코이는 그런 여자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마트료나 사브비슈나. 전해지기로는 쿠르스크 농가 출신 여성이었다. 크람스코이는 첫눈에 반했지만, 결과적으로 둘의 사랑은 맺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크람스코이를 둔 채 다른 귀족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도 있다. 사실 크람스코이가 그녀와 사귄 적이나 있는지, 《신곡》의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그랬듯 애절한 연심을 품은 것으로 끝났는지 또한 정확하지 않다. 이밖에 <미지의 여인>이 원래는 제국의 제12대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두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초상화였다는 설, 소수민족 레즈긴인 여성을 그려봤다는 이야기 등도 있다. 역시나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지금껏 알려진 바로는 크람스코이, 그는 <미지의 여인>을 놓곤 한 줄의 일기도 쓰지 않았다. 작업 과정을 시시콜콜 늘어놓기 쉬운 편지에서도 <미지의 여인>에 대해선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단정한 여자인지, 아니면 자신(몸)을 파는 여인인지. (…)
그는 언젠가 또 이런 식의 말이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 도입부’처럼 그리다
이반 크람스코이, 책 읽는 여인(화가의 아내), 1866년경, 캔버스에 유채, 64.5x56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크람스코이는 묘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발걸음을 끌어당기고, 일단 앞에 서면 벗어나지 못하게끔 하는 흡인력이었다. <미지의 여인>도 그랬다. 화가는 아리송한 말이나 하고, 정답 없는 추측은 쏟아지고, 지적과 비판 또한 만만찮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그림을 붙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그녀 곁을 떠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미지의 여인>이 그렇듯, 그의 그림이 문학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을 보는 순간 상황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그런 한편 주제와 의미 또한 추측하며 분석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촘촘히 짜인 문학에서나 겪을 이런 경험을 주는 건 확실하기에. 예나 지금이나 그림을 잘 그리는 이는 많지만, 빠져들게 하는 ‘열린 그림’을 잘 그리는 이는 흔치 않으니까.
열린 그림의 이유
이반 크람스코이, 자화상, 1867, 캔버스에 유채, 52.7x44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크람스코이는 1837년 러시아 제국 오스트로고슈스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때부터도 흔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아카데미 창립 100주년을 맞아 열린 미술 경연대회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왜? 그림 주제를 자유롭게 고르지 못하고, 기법 또한 고전주의 양식을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크람스코이 등 우등생 열네 명이 단체 보이콧을 하는 초유 사태였기에, 훗날 ‘14인의 반란’이란 용어로 굳어지기도 한다. 이때가 1863년이었다. 그의 나이로는 스물여섯이던 때였다. 그리고 1870년. 크람스코이는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함께 조직을 꾸린다. 이른바 ‘이동 전시 협회(이동파)’였다. 이름 그대로였다. 전시회를 ‘이동’하면서 연다는 말이었다. 보다 풀어서 말하면, 지금껏 황궁 또는 대도시 미술관 등에서나 볼 수 있던 그림을 안고 서민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이후 키이우, 하리코프, 카잔, 오룔…. 이는 일종의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크람스코이가 생각할 거리 많은 그림을 즐겨 그린 건, 이런 행보와도 상당 부분 맞물려있지 않을까 한다.
비평가도 비평가지만, 크림스코이는 누구보다도 민중이 자기 그림 앞에서 느끼기를 원했을 것이다. 무한한 상상의 묘미를. 그렇게 해 이들의 시야와 식견 또한 넓어지기를 바랐을 터였다.
할 말 많은 예술의 효과
이반 크람스코이, 광야(사막)의 그리스도, 1872, 캔버스에 유채, 180x210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크람스코이의 또 다른 대표작 <광야(사막)의 그리스도>는 제2회 이동파 전시회 중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슴푸레한 새벽, 그리스도가 황야의 바위에 앉아 기도를 올린다. 퀭한 얼굴과 막막한 눈빛은 짙은 고뇌를 느끼게 한다. 얇은 천과 창백한 땅은 통증을 체험하게 한다. 흙먼지 묻은 맨발은 또 어떤가. 이는 그의 쉽지 않았을 과거 또는 앞으로의 쉽지 않을 미래를 예상하게 한다. 이 그림은 예수가 황야 위 마흔 밤의 방황 끝에 갈 길을 결정하는, 그 순간을 담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지의 여인>만큼은 아니지만, <사막의 그리스도> 또한 보는 이에게 많은 상상과 해석을 낳게 했다. 혹자는 이를 단순히 종교화로만 봤다.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낭인에 빗댔다며 신성모독을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절박함을 가장 잘 보였다며 칭송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비교적 근대화가 더뎠다. 그리스도가 실은 이런 현실 앞에서 괴로워하는 민중 또는 지식인이 아니냐는 의문과 논란도 있었다.
나는 그림이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
많은 이가 그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또 어떤 이는 전혀 인정하지도 않았다. (…)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사들인 트레티야코프의 말이었다.
이반 크람스코이, 광야(사막)의 그리스도(일부 확대), 1872, 캔버스에 유채, 180x210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다만, 크람스코이는 그림을 놓고 어떤 말이 어떻게 오가든 이를 ‘나쁘지는 않은’ 상황으로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백가쟁명(百家爭鳴)식 토론이 이어질수록 민중의 사유의 폭도 넓어지고, 지식과 비판적 사고도 함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게 사회개혁 운동의 목표이지 않은가. 우리 또한 <미지의 여인>을 두고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정답 없는 그림 덕에 외려 문학과 역사, 문화, 화가의 개인사까지 크고 넓게 둘러볼 수 있었으니.
개혁가, 낭만가, 예술가
이반 크람스코이, 위로할 수 없는 슬픔, 1884, 캔버스에 유채, 22.8x14.1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그렇다면 크람스코이는 아리송한 그림만 그리기에 특화된 화가였는가.
글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오해다. 크람스코이는 한 분야에 치우친 예술가가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초상화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주제가 정해진 ‘닫힌 그림’ 또한 탁월하게 그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가령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을 보라. 여인이 울음을 삼킨다. 머리칼은 희끗하고, 눈 아래 주름은 볼까지 내려와있다. 손수건을 쥔 손도 앙상할 뿐이다. 그녀가 입은 건 상복. 옆에는 꽃송이가 가득하다. 한때 그곳에는 관이 올려져 있었을 터였다. 꺼진 램프, 쌓인 종교 서적, 어두컴컴한 배경의 그림,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튤립, 고결과 신비를 의미하는 수선화. 이 여인은… 어린 자식을 잃었을 것이다. 그림은 제목 그대로다. 누구도, 무엇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다. 이 그림이 끝없이 흘려보내는 건 자식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이다. 이것 말고 뭘 더 떠올릴 수 있는가. 이미 그 감정만 오롯이 느끼기에도 벅찰 지경이지는 않은지. 크람스코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 니콜라예브나에게는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림에는 그 순간의 기억 또한 서려있을 것이다.
이반 크람스코이, 그의 딸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크람스코이), 1884, 보드에 유채, 16.5x24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도 계속해 낮은 곳으로 임하고자 했던 개혁가. 민중의 여정을 크게 살펴보고, 개인의 삶 또한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던 낭만가.
그런 크람스코이는 생각이 많고, 자기검열 또한 무척 심해서였을까.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슬퍼하고, 더 깊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바랐던 것, 그리고 해야 했던 일에서 (나는)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내 곁에는 더 이상 양심의 목소리나 천사의 나팔처럼 사람에게 ‘너는 어디로 가는가. 그게 진짜 네 길인가. 그저 길을 잃은 것인가’라고 알려줄 사람이 없다. 내게서 더는 기대할 게 없다. 나도 나를 기대하지 않는다.” 생의 말년에 접어들었을 땐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
그리다… 죽다
이반 크람스코이, 카를 라우후푸스 박사의 초상화(미완성), 1887
그런 크람스코이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가 쉰 살이 된 1887년의 어느 날. 그는 의사 카를 라우후푸스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붓을 든 채로 쓰러졌다. 그러곤, 다시 일어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크람스코이다운 마지막이었다. 사인은 대동맥류. 계절은 아직 봄이었다. 크람스코이는 살면서 몇 개의 수수께끼를 보였고, 개혁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띄웠으며, 무엇보다도 민중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남기고자 했다. 이를 한데 모아 뭉쳐내면, 결국 남는 건 무한한 인류애가 아닐까 싶다. 어떤 예술은 이를 위한 도구로도 쓰일 수 있다. 그의 삶 또한 따져볼수록 <미지의 여인>만큼 깊고, 절절했다.
참고 자료
Kramskoi, Ivan N., Ivan Nikolaevich Kramskoy: His Life, Correspondence, and Art Critical Articles, Saint Petersburg: Suvorin Typography
Kramskoi, Ivan N., Kramskoy: Letters. Article,. Moscow: Iskusstvo
이반 크람스코이, 유대인의 왕이여 기뻐하라, 1870~1880, 캔버스에 유채, 373x501cm, 러시아 박물관


